살면서 생각하고 사랑하며...

다시 조명해보는 숭례문...

귀촌 2008. 2. 18. 10:15

아래 숭례문(남대문) 수문장 교대식은
'하이서울 페스티벌'이 열리던 2006년 5월 7일 일요일
10시 촬영한 이미지입니다





국보1호 숭례문(崇禮門·南大門)


숭례: 예(禮)를 받든다.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숭례문은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서울역사 (2006년 12월 17일 일요일 9시 촬영)


*국보와 보물의 차이*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역에서
제일 먼저보이는 것은 바로 앞에 보이는 남산 그리고 남대문이 보인다.


국보
국보지정과 보물지정의 차이점은
국보는 보물의 가치가 있는 것 중에서
역사적·학술적·예술적기술적 가치가 가장 으뜸인 것으로,
제작연대가 오래되고 시대를 대표하거나 가장 우수하며 특이한 것으로
역사적 인물과 관련이 있는 문화재이다. 




국보 제 1호 숭례문 (2006년 5월 7일 일요일 10시 촬영)


국보란 역사적·학술적·예술적·기술적인 가치가 큰 문화재로서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지정한 문화재로서 보물로 지정될 가치가 있는 것 중에
제작연대가 오래 되고 시대를 대표하거나,유례가 드물고 우수하며 특이하거나,
역사적 인물과 관련이 있는 것을 지정한다.




하이 서울 페스티벌 당시 수문장 교대식


보물
목조건축·석조건축·전적(典籍)·서적·고문서·회화·
조각·공예품·고고자료(考古資料)·무구(武具) 등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 중에서
역사적·학술적·예술적·기술적 가치가 큰 것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정부가 지정한 문화재로서 보물은
관보(官報)에 고시(告示)된 날로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국보1호 숭례문(남대문)


한편 국보처럼 시대를 대표하거나
특이한 것이 아니더라도 또 역사적 인물과 관련이 없더라도,
일반적인 지정의 수준에 이르면 보물이 된다.
그래서 보물의 수는 국보보다 많고 동형의 것들이 많다.




홍예문 천장에는 청룡과 황룡이 역동적이며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보물로 지정되면
문화재보호법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보물 지정의 연혁을 보면 일제강점기에는‘조선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에 의해 지정되어 1955년 이전에는 유형문화재는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었다.




홍예문에서 바라 본 城 바깥 세상. 멀리 서울역사가 보인다


이를 같은 국보(國寶)로 명칭을 바꾸었고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 공포되어 1963년 재지정하면서
728점의 지정문화재 중 386점을 보물로 지정하였다. 
2001년 11월 현재 지정된 보물은
1,315점(해제 문화재 제외)에 이르고 있다.




숭례문 수문장 교대식


서울 숭례문(남대문) 서울崇禮門(南大門) 지정번호 :
국보 제1호(지정연월일:1962년 12월 20일)
소재지: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 29 -시대:조선 태조 5년(1936)
규모·양식:1동 정면 5칸.측면 2칸,건평 53.79평, 2층의
우진 각 지붕 다포집(재료:석조기단,목조)




숭례문 수문장 교대식


서울 숭례문은 조선시대 서울
도성(都城)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하는 과정에서 성종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국보1호 숭례문 수문장 교대식


조선시대에는 서울성곽이 동쪽의 남산에서 내려와
오늘날의 힐튼호텔 앞을 지나 숭례문에 연결되었고,서쪽에서는 서소문으로부터
상공회의소 앞을 지난 성벽이 숭례문에 직접 연결 되어있었기 때문에,
사람과 가축은 이 성문을 통하지 않으면 도성을 출입할 수 없었다.




'崇禮門'이라는 현판은 '지봉유설'에 의하면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하여 세로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썼다고 한다


1962년 숭례문을 중수할 때 나온 숭례문 상량일자를
묵서(墨書)한 대들보가 세개 발견되었다. 첫째는 태조 때 창건 당시의 대들보요,
둘째는 세종 때 개수시의 대들보요, 셋째는 성종 때 개수시의 대들보이다.




당분간 다시 볼수없는 국보1호 숭례문


창건 당시인 태조 때의 대들보에는
"홍무이십구년병자시월초지일상량
(洪武二十九年丙子十月初之日上樑)"이라고 묵서되어 있으니,
홍무 29년은 태조 5년(1396)에 해당하므로 이 해 10월6일에 상량하고
2년 후인 태조 7년 2월 8일에 준공하였다.
따라서 숭례문은 태조5년에 창건하였고 2년 후에
다시 고쳐지었음을 알 수 있다. 




불타는 국보1호 숭례문(chosun.com 참고)


세종 4년(1422) 도성을 개축할 때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고, 세종 30년(1448)에 개축하였다.
이때 개축한 이유는 숭례문이 기울거나 퇴락하여 개축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지대가 낮아서 볼품이 없고 또 당시 유행하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구애되어 숭례문의 지대를 높여서 남산과 인왕산의 산맥에 연결시켜
경복궁이 포국을 아늑하게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폭격을 맞은 듯 누각 1·2층이 완전히 전소되어
처참하게 내려 앉은 국보1호 숭례문(chosun.com 참고)


그러나 이런 저런 사정으로 개축공사는 뒤로 미루어지다가
15년 후인 세종 29년(1447) 8월에 착공하였는데, 숭례문이 문루와 석문을 완전히 헐어내고
기지를 높게 돋우어 양쪽 산맥에 연결시킨 다음 그 위에 새로 석문을 쌓고
문루를 건축하였으므로, 보수나 중수가 아니라 완전한 개축이었다. 




'예를 받든다'는 뜻을 지닌 숭례문 편액.
철거과정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며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숭례문 편액


서민들이 기차를 타고 서울로 상경했을 때
광화문보다 더 먼저 친숙하게 다가온 서민들의 서울 입성 통로 숭례문(남대문)
어찌 이런일이...안타까운 일입니다 조상이 물려준 고귀한 문화재가
한 순간에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표난다'는 말이 있듯이
쉽게 볼 수 있었던 그 숭례문이 다시금 그립다. 
화재로 소실된 문화재가 다시 복원되더라도 보물지정이 해제되는 경우가 있었기에
(쌍봉사 대웅전, 낙산사 동종은 복원 후 보물지정 해제)
일제 잔존 역사 청산-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 고적(古蹟) 제1호로 지정- 이라는 명제하에 국보1호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숭례문이 이번 화재로 소실돼어 바라 보는 이들의 시선은
안타깝고 착찹하기만하다.






영상자료/2008 한국의산천
당신도 울고 있네요/ 노래: 김성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