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생각하고 사랑하며...

'오송회' 사건의 전말.

귀촌 2008. 11. 25. 19:14

군산 오송회(五松會) 사건

 

<모의 내용>“4ㆍ19 정신을 본받아 의로운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이광웅) “일상에 연연하여 사회정의와 양심에 따르지 못하고 우물쭈물 살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박정석) “약하고 용기 없이 살아왔다”(전성원) “한 일도 없고, 하고싶은 일도 못하고 살아온 비겁한 삶이었다”(황윤태) “살아남을 권리도 없는 비겁한놈이었다”(이옥렬)는 말을 하며 반국가단체를 만들었다.

 

<학생 교사(敎唆)>“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은 그 목적이 미국에 경종을울리기 위한 것일 뿐 공산주의자들의 행동이 아니다” “농민들이 저곡가에 시달린다” “북한에도 지하철이 있다” “빈익빈 부익부야말로 우리나라의 구조적 문제다” “월남과 자유중국의 패망은 그 정권의 비민주성과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너희들도 앞으로 현실을 똑바로 볼 줄 아는사람이 돼야 한다”면서 북한을 찬양ㆍ동조했다.

평소 뜻맞는 교사들끼리 독서모임 활동

82년 조촐하게 4·19기념하며5·18 추모

5명이 소나무숲에 모였다고 '五松會' 둔갑

1982년 11월 25일 전북도경은 군산제일고등학교 현직 교사 8명과 전직 교사 1명 등 9명을 ‘오송회(五松會)’라는 반국가단체를 구성한 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이들의 모의 내용과 제자들을 교사한 발언을 열거했으며, 증거물로 월북시인 오장환(吳章煥ㆍ1916∼?)의 시집 ‘병든 서울’ 필사본과 김지하 시인의 ‘오적’이 게재된 일본 잡지 ‘불귀’ 등을 제시했다.

오장환은 일제시대 서정주 김동리 등과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 일원으로 활동하다 48년 2월 월북했다.오송회 사건의 발단은 ‘병든 서울’이었다. 82년 여름 시외버스 속에서이 시집의 복사본이 발견됐는데 신고를 받은 경찰이 이를 추적하다 군산제일고 교사들의 ‘모임’을 포착하게 된 것이다.

당시 함께 구속됐던 채규구(蔡奎求ㆍ51ㆍ군산 진포중 교사)씨의 설명. “5ㆍ18 직후부터 선생들이 모여 독서그룹을 만들고 토론도 했다. 동료교사인 이광웅(李光雄ㆍ92년 53세로 사망) 시인이 짐을 정리하다 어렸을 때 시집 ‘병든 서울’을 베껴두었던 노트를 우연히 찾았고, 그것을 동료 교사인 박정석(朴正石ㆍ59ㆍ현 서울 대명중 교사) 선생이 복사해 갖고 있었다.한 제자가 복사본을 박 선생에게서 빌려 갖고 다니다 버스에 두고 내린 것이 화근이었다. 경찰은 전북대 철학과 모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랬더니 그 교수는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려’ 등의구절을 지적하며, 지식인 고정간첩이 복사해 뿌린 것 같다고 진단했다. 경찰이 국문학과 교수를 찾아갔더라면 오송회 사건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경찰은 큰 기대를 갖고 내사를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이광웅 시인과 박정석 교사, 황윤태(黃潤泰ㆍ52ㆍ현 개인사업) 이옥렬(李鈺烈ㆍ50ㆍ현 전북이리공고 교사) 전성원(田成源ㆍ49ㆍ현 미국 거주) 교사 등 5명이 ‘5ㆍ18 위령제’를 갖고(박정석 교사 인터뷰 참고), 평소 자주 모여 ‘정부 비판’ 발언을 했음을 알았다.

경찰은 이러한 일들을 엮어 5명이 소나무 숲에서 모였다며 ‘오송회’란이름을 만들고, ‘군산제일고 교사 고정간첩단’으로 몰기 위한 로드맵을작성했다.한때 군산제일고 교사로 있으면서 이들과 교분을 가졌던 당시 KBS 남원방송국 방송과장 조성용(趙成湧ㆍ66ㆍ현 전주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씨를 ‘간첩단의 수괴’로, 채규구씨 등 다른 동료 교사들은 동조 혹은불고지 죄목으로 구속했다. ‘고정간첩’의 필수 요건인 북한과의 연결고리로는 ‘최후의 5ㆍ18 수배자’로 불렸던 윤한봉(55ㆍ현 광주 민족미래연구소 소장)씨를 지목했다.

박정석씨와 채규구씨에 따르면 당시 경찰은 ‘김일성-윤한봉-이광웅-오송회’라는 계보도를 이미 만들어 놓고 있었다. 11월 초부터 군산경찰서와전북도경으로 연행된 오송회 교사들은 경찰이 제시한 ‘계보도’와 ‘역할분담표’대로 진술하지 않는다며 지하 대공분실에서 40여일간 심한 고문을당했다.

검찰 조사를 받을 때도 고문한 경찰들이 바로 뒤에 앉아 시인을 강요했고, 진술 내용이 조금이라도 틀리면 다시 지하실로 끌려갔다. 이들 교사들은한결같이 “처음에는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나중에는 차라리 죽여달라고매달렸다”고 말했다.경찰은 윤한봉씨와의 관계를 끝까지 캐물었다. 윤씨는 광주민주화운동 직전(5월 17일) 광주를 벗어났으며 이후 서울에서 도피생활을 하던 중 이광웅 교사의 매제 집에 숨어 지냈던 적이 있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여동생 집에 들렀던 이광웅씨가 윤씨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경찰은 이를 빌미로 ‘윤한봉의 지휘를 받은 오송회’를 강요했던 것이다. 윤씨는 이미 81년 4월 29일 경남 마산에서 화물선으로 밀항, 6월 4일미국 워싱턴주에 도착했으며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등의 도움을 얻어정치적 망명 허가를 받았다.

오송회 사건이 진행 중에 이 같은 사실이 알려졌다. 결국 군산의 교사들이 미국에 망명해 있는 윤씨의 지휘를 받은 꼴이 되어 경찰은 스스로 ‘계보도’를 수정하는 등 법석을 떨었다.

 

재판부는 1심에서 이광웅(징역4년), 박정석(징역3년), 전성원(징역1년) 외6명에게 선고유예를 내렸다. 석방된 교사들은 선고유예마저 인정할 수 없다며 항소했다.그러나 고법은 오히려 이광웅(징역7년) 등 3명의 형량을 대폭 늘리고, 나머지 6명도 징역2년6월~1년씩을 선고하여 모두 법정구속했다. 83년 12월대법원은 고법의 선고형을 확정했다.

출처:http://blog.naver.com/les130/80005883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