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성적표

귀촌 2008. 12. 11. 12:00

 늦은 오후

지인과 창 넓은 카페에서 일상사를 얘기하는데

순식간에 사위(四圍)를 짙은 안개가 점령해 버린다.

눈에 들어오던 풍경은 대학캠퍼스였는데

건물 위 키높이에 살짝 걸린 엷은 노을과

가지런히 이발한 잔디, 야산의 벌목한 잡목이 모로누워 잠을청한 모습,

방학을 앞둔 젊은 대학생들의 바쁜 걸음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어둡고 신비한 안개가

그야말로 순식간에 이 모두를 차곡차곡 침잠시키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가로등 불빛은 희뿜한 너울을 뒤집어 쓴것 같고

차량은 긴 막대불빛을 휘저으며 헤엄치 듯 빠저나간다.

이런저런 삶의 얘기들에 언뜻언뜻 안개 물방울이 묻어나고

머릿속에서는 비행기 이착륙이 가능할까... 라는 가느다란 염려가 꼬리를 문다.

 

  모처럼 만난 사람이라 다소 아쉬움이 있었으나

정해진 시간까지 인천공항에 가야했기에

마무리를 이쁘게 포장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어둠까지 가세하여 불빛을 밝혀도 몇 미터 앞 밖에 볼 수 없다.

공항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에는 초조하게 비상등을 깜빡이는 차량이

드문드문 전조등 촉수로 길을 더듬고 있었다.

막네가 늦장가를 가려고 외국에 나갔다오는 길이다.

버스를 이용해 올 수 있겠으나 짐을 핑계로 영접(?)을 받고 싶은 모양이다.

연로하신 부모님은 외국인 며느리를 어떻게 맞느냐며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교적 잘 이해하고 말 한마디라도 힘이되어주는 형을 의지하고 싶은가보다.

나역시 함께 오는 차안에서라도 그쪽 사정얘기를 듣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우여곡절도 있었으나 내년봄이면 결혼을 하게될거란다...

 

  열한시가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아들녀석 수능성적표 받는 날이다.

몇 일 전부터 재수 하겠다는 말에 크게 기대하진 않았으나

현관문을 들어서니 분위기는 칠흑같은 어둠이다.

녀석은 운동하러 나갔고 아내는 공기빠진 고무풍선처럼 추~욱 쳐저있다.

조심스레 성적표를 훑어보는데 가슴이 꽉 막힌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숫자들이 작은 네모칸에 쭈그리고 앉아있다.

어떻하지...

녀석이 들어오면 무슨 말부터 할까...

순간 순간 많은 생각이 부침을 거듭한다.

녀석도 속이 상했는지 몇일 사이에 턱이 뾰족해졌다.

현관문을 들어서는데 아비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이내 방으로 들어간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을 드라마나 영화로 접할때는

그래, 그렇지...그렇고 말고... 마음속으로 되뇌인적도 있다.

그러나 막상 아들녀석의 초라한 성적표를 놓고는 표리부동한다.

그러면서도 직설적으로 내색하지 않으려 표정은 짙은 화장을 한다.

그래... 못마시는 술이지만 아들놈과 처음으로 대작(?)을 하자.

 

  식탁으로 불러내 남은 이강주 콜크마개를 열어 두잔 가득 넘실넘실하게 부었다.

평소 술을 안하는 아비가 술잔을 마주하니 녀석의 낯빛에 그늘이 일렁인다.

자~ 단숨에 마셔라...

마침 북어국물이 있어 안주로는 제격이다.

연거푸 또 잔을 채웠다.

원샷~!

빈 속을 헤짚는 알콜은 무인지경으로 온몸을 휩쓴다.

이런 저런 많은 얘길 하는동안 아내는 방문을 열지 않았는데

마지막에 하는말이 ' 아들아... 네 가슴속에 빛나는 이상을 갖고 있다 한들

세상으로부터 객관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면 펼쳐보일 기회조차 갖지 모하는 것이

현실인데 어찌 그걸 자각하지 못하니...'

 

  작은 종잇조각 한장에 짓눌린

어둡고 묵직한 분위를 지혜롭게 걷어내고

아들은 무엇인가 자신이 할 수 있는것에 매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