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에 생각나는 것.
어버이날에 생각나는 것.
솜털이 보송보송 올라오던 그해 여름
낡은 농가주택을 헐고 집을 지었다.
돼지우리와 소가 여물을 먹던 외양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동네 인근에 대형 돼지농장이 들어왔고
최신식 경운기가 요란한 음성으로 일하는 소를 몰아냈다.
또한 인근의 야트막한 야산은 소나무와 잡목이 일시에 베어지고
불도저의 쉼 없는 움직임에 붉은 황토 흙이 내보이는 밭으로 변모했다.
작은 마을엔 일대 혁명과도 같은 대 변화였다.
‘나라에서 하는 일이니 따라야지 별수 있나’
대체로 마을 분위기는 그렇게 흘러갔다.
그러나 유독 할머니만은 수심 가득한 얼굴로 달가워하시지 않았다.
뭐랄까... 수 십 년을 한결같이 보아온 삶의 터전이
너무도 급격히 송두리째 변화하는 것에 울렁증이 생겼는지 모른다.
얼굴 한번 대면한적 없이 부모가 맺어준 대로
혼례를 올리고 시집와 살던 주변 환경에 정이 들대로 들었는데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제멋대로 바꿔버리니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산이 밭으로 변하여 소득이 늘고
주택이 계량되어 주변이 깔끔해 졌는데 할머니 마음 한구석은 늘
허전함이 맴돌이 하듯 서성이고 있었다.
집을 새로 지으며 가구도 바뀌었지만 할머니 방안의 반닫이는
반질반질 윤이 나는 모습 그대로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요즘으로 말하면 시집 올 때 해온 장롱인 셈이다.
굳게 다문 입처럼 자물쇠가 늘 잠겨 있었는데 원목으로 짜 맞춘
근엄한 모습에 겉은 옻칠을 했으며 안은 칠을 하지 않은 모습
으로 뽀얗게 속살무늬가 살아있었다.
작은 서랍들이 장식을 대롱대롱 매달고 있었으며 할머니만의
귀중품(?)이 곱게 수면을 취하고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집을 떠나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할머니 방에
들어갈 일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런데 졸업을 앞둔 그해 겨울 할머니 방에서 손톱을 깎아드리고
홍시 몇 개를 먹고 있는데 반닫이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남자 한복 한 벌이 곱게 다듬질 되어 있었으며 누렇게 색이바랜
동정이 조붓하게 덧대 있었다.
두루마기와 파르스름한 대님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할머니께서 손수 베틀에 앉아 무명베를 짜고 다듬질 하여 아버지
장가갈 때 입힌 한복이라 하셨다. 그러나 그 뒤로 입지 않아
이렇게 갇혀있는 신세라고 하신다.
구한말을 지나며 단발령과 함께 복색은 급격히 양복으로 바뀌었으며
사람들은 그렇게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찾게 된 것이다.
유행에 뒤지고 볼품없다 하여 입지 않는 한복 한 벌
한 올 한 올에 정성과 자식에 대한 애틋한 정이 깃들어 있는 옷감을
만지작거리며 지난 세월의 숫한 변화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깊은 헤아림을 유행에 맞지 않는다고 거들떠보지 않는
아들의 모습에 서운함이 묻어날 때, 혹은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에 잠길 때
당신의 외로운 마음을 달래는 행위였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할머니께 효를 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부모의 정성을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헤아리고 알아주는 것...
그것이 가장 마음편한 효도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오늘이 어버이 날이다.
자식 된 도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새삼스럽게 생각해 볼 일인데...
현금봉투가 제일 인기란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현실적으로 가장 알맞은 의사표시인지 모른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 왠지 석연치 않게 뒷맛이 남는 까닭은 무엇일까...
물결처럼 잔잔한 정이 사운거리 듯 흘러야 되는데
불쑥 봉투하나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에
마음이 켕겨서 생기는 증상인가 보다.
오늘따라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깊은 심연을 자맥질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