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그녀의 회한

귀촌 2009. 10. 17. 16:05

그녀의 회한.


그녀의 머리카락 전체가 아랫부분은 하얗고 윗부분은 검은 색이다.

마치 실 뭉치를 흰색과 검은색으로 물들여 놓은 것처럼 보여 오랜 병상생활을

대변해주는 모습이다.

얼굴은 온통 주름투성이고 식사를 할 수 없어 코에 튜브를 삽입하여

특수 영양식을 공급받는 모습은 흡사 외계인을 연상케 한다.

손가락 마디마디는 수숫대 마디처럼 굵고 뻐석하게 메말라 있으며

온 몸의 다른 사지도 앙상하기 그지없으며 팽팽한 탄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팔순을 넘긴 고령이라 정상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크게 다르진 않겠지만

그녀의 삶을 회상해보면 참으로 모진 세월의 강을 건너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피란의 일환으로 일찍 결혼을 한 것이 오늘의 모습으로 인생 종착역에

다다르지 않았나 싶다.

결혼 직후 그녀의 남편은 일제 징용을 피하지 못해 일본으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다 천신만고 끝에 되돌아와 지금까지 수 십 년을 함께한 것이다.

징용의 후유증 이었을까... 남편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져 왔었다.

사소한 일에 벌컥벌컥 화를 잘 냈고 술을 마시면 때론 폭행까지 일삼으며

자식들 건사하는 일과 집안 살림은 도통 나 몰라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고지순한 그녀는 모진 맘도 먹지 못해 이혼은 생각지도 못했으며 8남매나 되는

자식들 뒷바라지에 평생을 희생한 것이다.

딸이 셋 있는데 지금은 여기저기 흩어져 따로 살고 있기에 예전의 친구처럼

의지하며 지냈던 시간들은 다시 오지 않았다. 물론 병원을 찾으며

이것저것 챙기고 보살피는 역할은 그들이 하고 있다.

아들들은 하나같이 무뚝뚝하였기에 아픈 그녀를 감싸며 다정히 어께 한번

주물러 준적 없다는 푸념을 하신다.


요즘 매일 아침 아들놈 학원에 데려다주고 곧장 그녀가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향한다. 간병인이 잘 대해주고 있지만 때에 따라선 직업적으로

대하는 경향도 있기에 심리상태까지 살피는 것은 조금 소흘한 것 같다.

아침 8시를 전후해서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대게는 코에 연결된

튜브를 통해 아침식사(?)를 하시는 경우가 많다.

만나 뵈면 조금만 지나도 어서 출근하라며 손짓을 하신다. 그러면서도

아침이면 출입문 쪽에서 눈을 떼지 못하신단다.

오늘 아침엔 휠체어에 앉히고 담요로 몸을 감싼 뒤 1층 로비 바깥으로

산책을 나왔다. 좀 설렁했지만 병실의 공기와는 확연히 달라 상큼했다.

모과나무에 큼직한 열매가 누르스름하게 익어있고

비바람에 떨어진 낙엽이 스산하게 뒹군다.

인내로 겨울을 견딘 나무는 봄의 수액을 빨아올려

수많은 초록 잎사귀를 낳았다. 그들은

작열하는 태양에너지를 받아 한여름 치열하게 살아봤기에

이제는 미련 없이 후임자를 위해 땅바닥으로 되돌아가 가는 시간이다.

인생이란 것도 자연의 순환하는 엄숙한 법칙안에 존재하기에 다를게 뭐 있을까...

그녀는 아무렇게나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낙엽을 보며 세상과 치열하게 살아온

자신의 지나온 여정을 되돌아 봐서일까...

소리 없이 주름진 두 볼 위로 눈물이 흐른다.

남편에 대한 회한 섞인 혼자만의 얘길 되 뇌이며 내가 곁에 서있다는 것도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손수건으로 닦아드리며 “지나간 세월 속에 잠겨있는

좋지 못한 기억을 끄집어내어 되새기는 것은 결코 건강에 이롭지 못합니다...”

지극히 교과서적인 틀에 박힌 위로가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그러나 그런 내게 그녀는 쓸쓸한 미소를 보여준다.

“자네가 곁에 있어줘 참으로 고맙고 행복하네...”

“우리 집 남자들은 한 번도 머리를 빗겨주거나 얼굴을 만지며 다정다감한

얘길 해준 적 없었는데...”

“당치않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지요...”

"허허... 내가 그럼 자네에게 부끄럼을 선물로 준것인가?... 이해하지? 허허”

혹시 난처해 할까봐 얼른 농담으로 바꿔 놓으신다.

 

병원앞 큰길에는 수많은 차들이 연신 오가고 그 꽁무니뒤로

시간의 잔해가 흩어져 날린다. 

단 한번도 망설임 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 된 것일까...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끝 모를 영원한 곳으로 진행되어 간다.

그 속에 인간은 수없이 반복되어 저 나뭇잎처럼 나고 지고를 반복해 갈 것이다.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무엇인가로 매듭지어지는 싯점에는

모두 같은 색채로 하나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세월과 운명이 정지명령을 낼릴 때 까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무조건 앞으로만 진행하려 하는것은 아닐까...

브레이크 없이 질주만 하다가 갑자기 정지하게 되면 무엇이든 상처를 입게 된다.

그 아픔을 최소화 하려면 가끔 한 번씩 스스로 삶의 브레이크를 밟아보며

혹시 잘못된 것은 없는지 살펴보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파란 하늘이 구름사이로 언뜻언뜻 스쳐지나가는 먼 허공을 응시하다 그녀는

병원 안으로 들어가자는 눈짓을 하고 나는 말없이 등뒤로 돌아가 휠체어 손잡이를 잡는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매일아침 그녀와의 데이트는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한다.

뇌경색으로 오른쪽 마비가 왔는데 이미 정상컨디션을 회복하기엔 불가능 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또한 고령이라 치료하는데도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기에

가족들은 남원의 요양병원으로 다시 모시기로 결정했다.

몇 일내로 아침데이트도 막을 내리고 기껏해야 한 달에 한번정도

내려가 뵐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아직도 수줍은 소녀처럼 순수한 눈망울을 간직하고 있으며

나를 "우리 이서방" 이라고 부르는 

한분밖에 없는 장모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