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에 생각해 본다.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에 생각해 본다.
당시 안중근과 이토히로부미가 처해있던 시대상황을 생각해 봐야 한다.
먼저 일본의 성장과정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본다.
그러니까 임진왜란(조일전쟁)이 일어나던 그 전후에 일본은 각 지방의
호족들이 내로라하는 군사를 거느리고 서로 땅뺏기 싸움을 지속하던 시절이다.
지루하고 기나긴 전쟁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한 오다 노부나가
그의 갑작스런 암살로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 역시 힘에 부친
조일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사망하고 뒤이어 세력을 잡아 기초를 다진
도쿠카와 이예야스 이 세 사람이 근대 일본을 세운 장본인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막대한 부富를 형성하는 기초를 다질 수 있었을까...
수많은 경우가 있겠지만 그중의 하나 확실한 것은 조선의 문화를 수출해 얻은
외화벌이에 그 기초가 잡힌 것은 분명한 일이다.
당시 섬나라 일본은 해상무역이 활발했고 수많은 외국선박이 드나들고 있었다.
그러나 농.수산물 말고는 이렇다 할 부가가치가 있는 물건이 없었는데 그 해법을
제시한 것이 조선의 도기陶器였다. 조일전쟁 당시 조선의 수많은 도공들이
강제로 끌려와 일본에게 그 기술을 전수해 주었고 그로인해 질 좋은 명품
도자기를 만들어 유럽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호평을 받았고 일본이란 나라를 더불어 대단하게 인식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따라서 이 연장선상에 놓인 일본은 서양의 근대문물을 보다 일찍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한발 먼저 명치유신을 통해 근대국가의 모습을 다지게 된 것이다.
그러한 그들이 유학을 다녀온 이토히로부미 같은 유능한 인제(일본입장에선)를
기점으로 아직 깨어나지 않은 조선을 삼켜 국력을 신장시키려 한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그렇다면 당시 조선의 실정은 그야말로 피폐하기 그지없었다.
양반귀족세력의 중심사회가 수 백 년을 지나며 곳곳에서 부패하다 급기야
동학농민전쟁까지 불러오는 사태에 다다른 시점이었다.
청년 안중근은 바로 이 시절에 진압군 입장에서 나름대로 입지를 굳힌다.
그러나 갑오농민전쟁은 외국군대를 끌어들이는 결과를 초래했고 국제사회는
격변기에 들어서게 된다. 이때 앞장서 조선을 삼킨 장본인 이토히로부미를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유승렬, 김성화, 탁공규 7인이
단지동맹을 맺고 거사를 계획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안중근이 성사시킨 것이다.
일본의 침탈에 대해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목숨과 재산을 내걸고 그들과 맞서 기나긴
싸움을 해왔기에 그나마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다고 본다.
간략하고 너무나 간략하게 서술해 보았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는 그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잊고 지내며 자신의 안일만을 생각하진 않는지 되돌아 봐야 할 것이다.
지나온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 하는 어리석은 후손으로 남지않기위해 지혜를 모아
산적한 수많은 국가적 난제들을 슬기롭게 풀어나갔으면 하는 바램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