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욕적인 쌀값.
굴욕적인 쌀값을 보며
11월은 가을과 겨울이 뒤섞여 구분 짓기 애매한 구석이 있다.
몇 일간 영하의 추위가 매섭더니 어제부턴 기온이 올라
평년기온을 웃돈다는 예보가 나온다.
계절의 변화를 기온만 갖고 판단할 수 없겠지만 급격한 산업화에
지구의 환경은 달라졌고 인간의 생태 또한 바뀌어 가고 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의식주의 변화는 분명 풍족하고 화려하게 변모하여
지녀온 가치관마저 바뀌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 되고 있다.
인간의 두뇌가 너무 똑똑해진 탓일까... 명석해지면 좋지 그 앞에 ‘너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모든 논리의 중심에 경제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얄팍한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 많기에 다른 각도에서 보면 부정적으로 보이는 일면이라 하겠다.
오늘 아침 신문 한 귀퉁이에 개 사료 값 보다 못한 쌀값 얘기가 실려 있었다.
개가 먹는 사료와 사람이 먹는 쌀은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는 근원적인 한계가 있다.
그러나 신문의 기사는 다른 내용은 차치하고 그 값으로 동일선상에서 재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개 먹이와 사람의 주식인 쌀을 ‘값’이라는 경제적 가치로
잰다면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농자는 천하지 대본이라 하여 사람이 먹는 식량을 생산하는 생산자를 근본으로
삼으려 했던 당시의 정치인들의 생각이 틀린 것일까...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어 굳이 쌀이 아니더라도 먹고 살 음식은 넘쳐난다.
단, 돈만 있으면 말이다.
생업으로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그 수고로움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알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분명
존재하며 재배하는 일손 하나하나에 표현할 수 없는 정성이 깃든 것이다.
물론 각종 공산품도 그 과정을 보면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는
목숨을 연명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다.
아무리 최첨단 재품을 만든다 할지라도 공산품으로 뱃속을 따뜻이 채워
허기를 달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서로 유기적으로 긴밀히 관련되어 있기에
이러한 생각이 다소 억지스럽다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이아침 사람이 먹는
쌀값이 개가 먹는 사료 값 보다 못하다는 신문기사는 한없이 슬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