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볕 즐기는 오후.
봄볕 즐기는 오후
방사능 빗물이 지나간 자리에 봄볕이 화사하다.
창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 속에 나른한 향기가 묻어난다.
현기증 끄트머리를 잡고 일어서는데 발 뿌리에 차인 보도블록이
저만치 혼자 나뒹군다.
딱히 목적지가 없는 걸음이라 시선과 생각이 따로따로 제각각이다.
편의점에서 커피 하나 빨대를 꽂아 입에 무는데 아지랑이처럼 걷는
어린 아이가 비둘기를 쫓는다. 스무 살 여인의 향기가 난다.
족히 몇 십 년은 묵어있던 기억 하나가 문득 눈앞에 되살아난 느낌이다.
하릴없이 보내던 어느 일요일 그날도 이런 봄날이었다.
도심 어귀로 쫓겨난 야산은 수줍은 진달래꽃을 내어주며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억센 인간의 야심에 더 이상 내어줄 살점이 없음을 보여주려는 모습으로...
간드러지게 하늘거리는 바람과 자지러지게 내려앉는 볕의 향연이 사람들을
도심 밖으로 유혹해 냈기에 오히려 가까운 야산은 호젓했다.
땅에 달라붙어 유심히 관찰하지 않으면 눈에 띄지도 않을 제비꽃과 털북숭이
할미꽃도 한껏 치장하고 바깥나들이를 한 모습이었다.
물론 지금 주변은 이러한 옛 친구들이 어디로 이주해 갔는지 알 수 없고
그저 기억속의 박제로만 남아있다.
군대를 막 제대하여 복학한 상태도 아니고 어떤 목표도 없이 군에서 고생한
대가를 보상받고 있다는 심정으로 마냥 유유자적 하던 시절이었다.
친구들은 각기 입대시기가 달라 엇박자를 내 듯 제대 또한 그랬다.
산모퉁이를 돌아 작은 개울을 건너려는데 눈을 의심할만한 그림이 눈앞에 펼쳐졌다.
걷는 것보다 기는 것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어린 아이가 뒤뚱거리며 참새 꽁무니를 쫒고 있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야산이라고는 하나 도시에서 제법 떨어진 곳인데
이런 곳에 어떻게 저 작은 아이가 혼자 있을까... 혹시 낯선 사람을 보고 놀라
울지나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서는데 옹알옹알 하며 달려들었다.
넘어 질까봐 얼른 안아 올렸다. 낯가림은커녕 아주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식구처럼
아이는 그렇게 안겨왔다.
말도 못하는 아이에게 엄마는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연신 방긋 방긋 웃기만 했다.
금방 젖을 먹었는지 인형 같은 작은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시큼한 버터 내음이 새어났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사이에 개울물에 빠지기라도 했더라면 어찌 되었겠는가...
그 순간 젊은 아가씨가 허둥지둥 달려와 불쑥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아저씨~ 고맙습니다.”
긴 머리에 앳돼 보이는 얼굴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리고 뭐라고 얘기할 틈도 없이 아이를 냉큼 빼앗다시피 안아갔다.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왜 아이를 혼자 있게 했는지, 아이엄마가 맞는지 그 어떤 것도
물을 틈을 주지 않고 순식간에 멀어지고 말았었다.
좀 황당한 순간이었지만 그 찰나의 순간 머리칼이 코끝을 스쳤고 알 수 없는 향이
오랫동안 서성거렸다. 페퍼민트처럼 상큼했고 유채꽃과 아카시아가 섞인 듯한 야릇했던
그 향기는 지금껏 두 번 다시 경험하지 못했다.
사람에게 나는 향기는 무엇일까?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보니 혈기왕성할 때 느끼던 상큼한 향기는 없지만
오래 숙성되어 잘 우러난 와인처럼 은은한 향을 지닐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 같다.
아파트 베란다 앞으로 보이는 산등성이에 앙증맞은 연분홍 치마가 나부낀다.
따사로움 가득 봄볕이 소풍을 즐기는 오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