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경남 합천에서 가난한 농부의 십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전두환은 어린 나이에 두 명의 형과 동생 한 명이
사고와 질병으로 숨지는 비극을 겪으며 자랐다. 대구공고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육사)에 입학한 그는 1955년
육사 11기로 졸업해 소위로 임관한다.
인생 역전의 드라마, 그리고 비극의 시작
전두환은 육사 재학 시절 성적이 좋지 못해 한직과 교육기관 등을 전전했다. 대위 때에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사장교(ROTC) 교관으로 근무하다가 박정희 육군 소장이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키자 쫓아가 합류한다.
특히 차지철 등 육군사관학교 장악 임무를 맡은 쿠데타 세력을 따라 육사에 간 5월17일,
'강영훈 육사 교장이 생도들의 5·16 지지 시위를 막고 있다'고 밀고해 강 교장이 쿠데타 세력에 의해 직위를 박탈당하고
구금당하게 한 뒤 박정희와 김종필의 신임을 얻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두환이 속해 있던 파벌 모임인
'오성회'(나중에 하나회가 됨)가 쿠데타에 반대하거나 동참을 거부했던 우수한 장교들을 제치고 서서히 육군 내 주류로 부상한다.
다음날인 5월18일, 박정희 소장의 신임을 얻어 육사를 장악한 전두환이 육사생도들을 이끌고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을 벌여 관심을 끈다. 영문을 모르던 시민들은 깃털 달린 멋진 제복을 입은 생도들이
열을 맞춰 행진하자 구경삼아 늘어서 박수를 쳤고, 이 광경을 지켜본 외신들과 주한 외국공관들이 '다수
시민이 쿠데타를 지지한다'는 소식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쿠데타 초기, 군 내부에서도 반대 기류가 심상치 않았고
여론과 국제사회의 시선도 비판적이었기에 실패 가능성이 높았던 상황을 극적으로 반전시킨 사건이었다.
전두환은 그 공로로 '이름 없는 대위'에서 졸지에 최고 권력기관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비서관을 거쳐 '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으로 임명되는 등 '벼락출세'를 거듭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친위세력인 '하나회'
소속 군인들을 요직에 임명하는 수완을 부리기도 했다.
스스로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측근 정치인이 필요했던 박정희가 전두환에게 국회의원이 될 것을 권유하자
"각하, 군대에도 충성스런 부하가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해 더욱 큰 신임을 받게 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 뒤 군 내 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한 전두환은 육사 동창회장에도 선출되면서 공식·비공식적으로 군을 장악하게 된다.
성적이 낮아 동기들에 비해 승진이 늦고 한직만 전전하던 전두환이 5·16 군사쿠데타라는 기회를 포착해 가장 강한 권력자에게
충성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권력을 틀어쥐게 된 것이다.
전두환 본인과 가족, 그리고 측근들에게는 엄청난 부와 권력을 가져다주는 '인생 역전의 드라마'가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대한민국과 국민에게는 더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과 오욕이 가해지는 '권력에 의한 범죄'의 불행한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전두환이 육군 소장으로 보안사령관에 재직 중이던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당해 숨지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이미 권력과 정치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체득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졸지에 대통령직을 승계한 최규하 총리의 유약함을 간파했다.
계엄법상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에서 그는 본부장을 맡았고 하나둘 권력을 접수해나갔다. 그의 예상대로 대통령 피살사건 수사와
처리가 합동수사본부의 소관사항이 되자 발빠르게 중앙정보부 차장들과 검찰총장, 경찰청장을 불러 자기 휘하에 위치시켰다.
모두가 허둥대던 때 전두환 합수부장은 박 대통령 사망 현장에 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김계원 비서실장을 체포하고,
12월12일 자신의 상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마저 체포하면서 본격적인 야욕을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전두환의 하극상에
저항하던 김오랑 소령 등 의로운 군인들은 신군부 세력의 총격을 받고 사망하게 되고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도 체포된다.
연쇄살인범이 피해자를 능멸하는 짓
군을 장악한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을 위협하고 국방장관까지 체포하면서 국가권력을 실질적으로 찬탈하게 된다.
전두환은 이후 주한미국대사를 찾아가 "부패를 일소한 뒤 다시 군으로 복귀할 테니 승인해 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그 말은 5·16 쿠데타 당시 주한미국대사를 찾은 김종필이 했던 말과 똑같았다. 이미 전두환이 오래전부터
5·16 쿠데타의 성공 과정을 연구하며 '박정희 이후' 권력을 잡기 위한 쿠데타 준비를 해왔다는 정황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권력을 장악한 이후 계엄령 선포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등을 거치고 자기 스스로를 대장으로 승진시킨 뒤
예편하고 대통령으로 취임하기까지의 과정도 박정희와 똑같았다. 너무도 똑같은 '5·16 쿠데타의 모방'이다 보니
시민과 학생들은 전두환의 다음 수순을 예측하고 강하게 반발했다.
서울역 광장에선 1980년 5월1일부터 전국의 대학생 10만여명이 모여 전두환과 계엄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전두환 신군부는 '북괴 남침계획설'을 퍼뜨리며 학생 시위도 북한의 조종에 의해 선동되고 있다고 발표하고는 강경 진압을 시도했다.
학생들의 시위는 굴하지 않고 5월15일까지 계속됐다. 전두환은 5월17일,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를 선포하고는 국회를 군대로 포위하고
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 유력 정치인들과 야당 국회의원들을 체포·구금했다.
시간이 흘러, 1996년 8월26일, 서울지방법원은 전두환의 12·12 군사쿠데타에 의한 권력 찬탈과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군사반란에 의한 내란죄로 규정하고 사형을 선고하게 된다. 그해 12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전두환은 1997년 4월17일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최종 확정된다.
전두환의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이후, 5·16 쿠데타와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다. 17년에 걸친 기나긴
박정희 군사독재에 지칠 대로 지친 시민들이 '또다시 군사독재에 시달릴 수 없다'며 강한 저항에 나선 것이다.
전두환이 5·16 쿠데타 과정에 참여하며 신분상승의 꿈을 이루고 권력을 찬탈하는 방법은 배웠지만, 대화하고
타협하고 설득하는 능력은 전혀 갖추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하면 된다' 식 철권통치를 보면서
학습한 것도 '힘과 폭력으로 반발을 짓누르면 된다'는 것이었다.
5월18일 광주에서 발생한 '군사쿠데타 반대', '김대중 체포 반대' 시민시위는 무력 앞에서 수그러들지 않았다.
전두환이 투입한 계엄군이 총칼과 탱크, 장갑차를 앞세우며 위협했지만 시민의 저항은 더욱 거세지기만 했다.
5월21일,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면서 비극적인 유혈충돌이 시작됐다. 시민들은 파출소와 예비군 무기고 등을
습격해 무기를 손에 넣고 '시민군'을 조직했다. 전남도청을 장악한 시민군은 계엄군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계엄군은 이를 거부하고 5월27일 총공세를 감행했다. 모두 165명의 시민과 23명의 군인, 4명의 경찰관이 숨지고
23명이 실종됐으며 3000명 이상이 부상당한 것으로 파악됐다. 실제로 누가 직접적인 발포 명령을 내렸는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시위 진압을 위해 무장군대를 투입하고 실탄을 지급하고 전투 상황으로 내몬 것은 궁극적으로
전두환의 책임이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법부의 판단 역시 같았다. 12·12와 5·17 사건을 '군사반란, 내란 범죄'로 판결한 1997년 대법원 재판부는
5·18 광주항쟁에 대한 학살 책임이 전두환에게 있다고 확인하고 '내란 목적 살인죄'를 선고했다. 전두환은 재판 과정에서
5·18 광주항쟁을 '폭동'이라고 부르며 자신이 군대를 동원해 유혈진압한 것을 '정당했다'고 강변해 사회적 분노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전두환의 주장은 지금도 지만원 등 일부 극우론자들에 의해 반복 주장되어 1980년대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부
청소년과 우익 성향 국민들이 사실로 믿는 폐해가 계속되고 있다. 이는 마치 연쇄살인범 지존파나 유영철이
"부자와 여성들이 잘못해서 살해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범행을 정당화하고 피해자들을 모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망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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