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생각하고 사랑하며...

친일 궤변.

귀촌 2009. 3. 3. 12:28

친일 궤변


  “낙동강 칠백리 공굴 놓고

하이카라 잡놈이 손찔한다."

경상도 창원지방에서 구전되는 민요다.

‘공굴’은 콘크리트.’ ‘하이카라’는 일본식 조어로 양복쟁이를 가리킨다.

경부선 철도가 놓이던 시절 우리민족 인부들의 한이 담긴 노래다.

‘공굴다리’를 놓는 철도공사판에서 양복차림의 일본인 십장이

“바가야로” 하며 욕설을 퍼붓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문학평론가 유종호 교수는 ‘단 두줄짜리 이 민요는 그대로 식민지 풍경의 축도’

라고 평했다.

  깨진 유리조각도 햇빛을 반사하고, 도랑물도 달빛을 담는다고 한다.

창원지방의 풍요(風謠)에 식민지의 애환이 달빛처럼 서렸다면, 다음의 시조는

무슨 진실을 비추고 있을까.

“다 부서진 때에

혼자 성키 바랄소냐?

금이야 갔을망정

벼루는 벼루로다

무른 듯 단단한 속을

알 이 알까 하노라."

최남선의 ‘깨진 벼루의 명(銘)이란 시조(1926)다. 일제시대 지식인의 고뇌를

노래한 듯하지만 작가 조정래의 독법(讀法)은 또 다르다. ‘깨진 벼루’는 ‘다들

금갔는데 혼자 성할 수 없다‘는 변명에 불과하다. 그는 대하소설 <아리랑>

후기에서 이런 자위는 “그때 친일 안한 사람이 어디 있나” “너라도 별수

있었겠냐"는 궤변으로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국어교과서에서 이 시조를 접한 조정래는 두 가지 분노를

느낀다. 하나는 친일의 변명이 어찌 이렇게 뻔뻔스럽냐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런 시조가 어떻게 교과서에 버젓이 실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분노는 <태백산맥>에 이어 <아리랑><한강>에 이르기까지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스스로 ‘글감옥’에 갇히는 동기가 된다. “36년 동안 죽어간 우리민족의

수가 400여만명! 200자 원고지 2만장을 쓴다해도 내가 쓸 수 있는 글자 수는

얼마인가." <아리랑>을 시작하며 책상에 써붙인 조정래의 자계문이다.

  청와대 비서관이 일제 때 친일이 불가피 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감안해야지 무조건 매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깨진 벼루’ 타령으로 많이 듣던 소리라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다. 다만 그만한

위치의 사람이, 그것도 독립기념관에서, 하필 3.1절날 그런 말을 한 게 알려져

새삼스러울 뿐이다. 민족에게 손찌검을 하는 ‘하이카라’들이 도처에 널린 것도

새로운 사실만은 아니다.



                                                   여적(餘滴)


                                                   김태관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