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중국 "단둥" 여행기.

귀촌 2008. 6. 4. 15:52
 

외국으로 여행을 한다는 것은 새로운 호기심을 자아낸다.

사람 사는 세상이지만 우리와 많이 다른 사회를 본다는 자체가

충분한 자극을 불러오는 것이다.


이번 여행은 좀 색다른 목적이 있었기에 즐긴다(?)는 생각보다

다소 긴장이 되었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이유는 조카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한 일정으로 잡은 것이기 때문이다.


큰 누나에겐 딸만 둘 있는데 그중 둘째딸이 중국유학중에 현지

총각과 눈 맞아 결혼에 까지 이른 것이다.

처음엔 반대를 많이 했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둘은 그네들의 사랑을 관철시킨 사례라 하겠다.


대련공항에 도착해 짐 찾아 공항 밖으로 빠져나온 시각은 우리시각으로 13시,

중국시각으로 12시였다.

‘대련’ 이란 항구도시가 중국내에서 크게 주목받는 도시가 아니어선지

공항 시설은 다소 실망감을 줄만큼 어수선하고 깨끗한 이미지는 아니었다.

또한 입국수속을 처리하는 사람들의 표정도 친근하게 와 닿지는 않았다.

‘스촨성’일대의 대지진으로 인해 어두운 표정이려니... 하고 짐작만 할뿐

확인하진 못했다.


조카아이 시어머니와 남편 될 청년과 사촌이 공항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들의 거주지가 압록강근처 ‘단둥’이었기에 약 4시간 정도를 달려온 셈이었다.

꽃다발 두 개를 준비하여 누나부부에게 건네며 환영하는 미소가 밝고 온화했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지만 눈빛만으로도 정감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대련에서 단둥까지 약 350km 정도 되는데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승합차를 이용해 가는데 시내를 벗어나는 동안 깜짝 놀랄 일이 도처에서 보였다.

도무지 ‘질서’라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만큼 차들과 사람들은 뒤엉켜 요리조리

빠져 나가는가 하면 역주행하며 차선을 넘나들고 방향지시등 켜지 않고

회전하는 것은 예삿일이 되어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준법’이란 단어는애당초 없는 분위기였다.

고속도로에 접어들어선 중앙에 분리화단이 조성되어 있었으나 속도를 감시하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곳은 없었다. 평균시속 150km 정도로 달리는 자동차...

휴게소는 단 한군데 있었다. 물론 교통량이 많지 않아 이용객이 없을 것이고

어쩌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설치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운전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대련’에서 ‘단둥’에 이르는 동안 눈에 들어오는 광활한 평야가 인상적이다.

멀리 산이 보이기는 하지만 대부분 논과 밭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내기가 한창이다.

소와 말을 이용해 써레질하는 모습과 짐을 나르는 모습은 전형적인 옛날

농촌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물론 간간히 농기계로 모내기 하는 모습도 보였다.

‘단둥’에 도착하니 톨게이트에 신랑의 아버지와 큰아버지 고모 친구 등이

차를 갖고 마중 나와 있었다.

악수를 하며 서로의 인사가 끝나고 호텔로 이동해 짐을 풀고

저녁 먹을 식당으로 안내받았다.

그곳에서는 유명하다는 고급식당이었고 나오는

음식은 정말 푸짐하고 맛도 괜찮은 편이었다.

다소 허기를 느꼈던 터라 맛있게 먹었는데

음식은 끊임없이 원탁위로 쌓인다.

독한 술이 몇 순배 돌았다.

환영 한다는 얘기와 한 가족이라는 의미가 전달되었다.

신랑 아버지는 중국 대도시를 오가며 귀금속 도매상과

수입자동차 매장을 운영하는 사업가다.

그래서인지 국제 감각과 중국인 특유의 상술이 몸에 밴 느낌이었다.

한국에 대해서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는 터였다.


음식점에서 보이는 특이한 것은 어지간한 식탁은 둥근 테이블로 되어있고

중앙엔 회전판으로 빙빙 돌려가며 먹고 싶은 것을 덜어먹는

형태로 되어있었다.(회전초밥집연상)

얘기하며 느긋하게 먹기에는 좋은 조건이었다.

술은 종업원이 계속 첨잔하는 형태가 우리와는 다른 풍경이다.

또한 남은 음식은 무조건 가져가는 것으로 되어있어

비닐봉지에 하나하나 싸는 모습도 이체롭다.

집에 가져가 안 먹더라도 가져가는 것이 풍습이란다.


만찬이 끝나고 긴 여행의 여독을 풀어야 한다며 불가마 사우나실로 들어갔다.

물론 이것도 손님에 대한 배려 차원이다.

처음 보는 사돈과 목욕을 함께 한다는 것이

선뜻 내키지는 않았지만 너무나 당연시하는 터라 따라 들어갔다.

형태는 우리나라 찜질방과 같은 느낌인데

한 가지 다른 점은 ‘안마’실이 있다는 것이다.

발 맛사지와 전신맛사지를 골라 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찜질방이 답답해 혼자 나와 있는데 종업원이 ‘안마 좋다?’ 하길래 호기심이 발동한다.

층을 달리하여 3층으로 안내되었다.

관절이 좋지 않아 도움이 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에 들어갔는데 입구에서부터

야한 차림의 아가씨들이 마치 먹잇감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웃음을 흘린다.

순간,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만으로 그냥 나올 수는 없었다.

룸으로 안내되어 가격표를 보니 50원에서 140원까지 다양한 메뉴가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돈 8천원에서 약 2만5천원 선이다.

가격으로 보아 문란한(?)한 행위는 없을것 같아

100원에 해당하는 것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좀 아프다는 느낌이 들만큼 힘을 주어 정성을 다하는 안마는 만족감을 주었다.

어림잡아 1시간가량을 하는 것 같다.

끝날 무렵 서툰 우리말로 ‘아가씨 3백원 조아?’

그러니까 우리 돈 4만8천원으로 아가씨 불러 문란행위(?) 할 것이냐는 물음이다.

내 자신이 성인군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미지까지 실추시킬 수 는 없었다.


아래층으로 내려오니 온 식구들이 난리다.

분명히 다함께 들어왔는데 나만 없어졌으니 여기저기 찾고 다녔나보다.

말도 안 통하는데 무슨 일 생긴 것 아닌가 하여 걱정들을 하고 있었다는데

어찌나 미안하든지... 아무튼 첫날일정은 소란 아닌 소란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튼 날 아침 공기는 초가을 날씨처럼 서늘하다.

호텔內 뷔페식당에서 도마토와 쌀죽, 과일밖에 못 먹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잘 먹는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은 조카의 시어머니 신랑 그 외 그쪽 사람들이다.

중국에서는 결혼식 몇 일전부터 집에서 음식을 만들지 않고

밖에서 사먹는 것이 전통이란다. 우리나라 같으면 오히려 음식준비로 바쁠 텐데...

결혼식은 내일(5월31일)이니 오늘은 완전한 자유시간(?)이다.


결혼당사자는 준비 할 것이 많아 남아있고

큰조카가 중국어 학원을 다니기 시작하여

단어 몇 개 섞어가며 얼기설기 의사전달은 되기에 관광에 나섰다.

아저씨(?) 승합차를 타고 만리장성 시작되는 곳으로 향했다.

약 30km 북쪽으로 이동하니 성벽이 나타난다.

그러니까 압록강과 인접한 섬 같은데 반대쪽은 북한 땅이다.

시작되는 城 안에 북한 상점이 있는데 여자 직원 두 명이 파견 나와 있었다.

우선 우리말이 통하니 반가웠다.

그림, 수예품, 공예품 같은 관광용품을 파는 곳이다.

‘녀기서 남녘동포를 만나니 반갑습네다’

고참으로 보이는 직원이 상품 설명도 하고 지리적인 여건도 얘기하는데

파견기간은 5년이며 자기는 2년이 지났다고 한다. 여권을 보니 87년생이다.

“고구려시대에는 이곳이 모두 우리 땅 이었을 텐데 아쉽네요.”

‘그러믄뇨... 이곳 이하 하삼성 일대는 전부가 우리네 녕토였습네다.

빨리 국력을 신장켜 통일도 되고 우리

선조님들의 땅도 회복했으면 좋겠습네다’

.............!

‘대련’에서 ‘단둥’에 이르는 동안 한없이 펼쳐진 농토를 보며

똑같은 생각을 했었기에 공감이 갔다.

어쩌면 일제 강점기 때 우리의 조상들이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피란 와 갖은 고초를 겪으며 일군 농토일 수도 있다.

역사에 ‘만약’이란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고구려 영토을 그대로 갖고 있다면

지금의 북한이 식량난으로 저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을...

물론 대한민국은 동북아의 주인으로

지금보다 훨씬 당당하게 자리 메김 하고 있을 진데...


그림 한 점이 맘에 들어 사려고 했더니 우리 돈 13만원 정도다.

북한의 이름 있는 작가가 그린 묘향산의 가을풍경이란다.

환전해간 돈이 많지 않아 망설이다 결국 못 사고 돌아왔다.

(나중에 귀국하면서 까지 후회되었음.)

성곽을 돌아보고 나오면서 먼발치로 보이는 그녀들의 모습은 마음을

시리게 만들었다. 빨간색이 주축이 되어 칼라풀 하게 차려입은 한복과

단발머리, 고무신 대신 하이힐을 신은 모습이 다소 어색해 보였지만

여느 중국 사람들보다 친근하게 와 닿던 그녀들의 이쁜 모습...

외화벌이를 위해 파견 나왔다고 하면서 웃음을 잃지 않았던 표정이었지만

언뜻언뜻 나타나는 그림자에서 민족적 회한 같은...그야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난다.


오후엔 압록강에서 유람선을 탓다.

말이 유람선이지 배는 낡고 작았다.

미팅을 했는지 여러 쌍의 젊은 커플들이 동승하여 왁자지껄했다.

압록강 철교가 북한의 신의주와 맞닿아 있다.

가끔 TV뉴스에 등장하는 그 철교다. 교각은 세월의 무게를 간신히 버티고

있는 양 군데군데 굵은 힘줄마냥 철근 골조가 보이는 곳도 있다.

강 한가운데를 지나며 신의주 쪽과 단둥 쪽을 번갈아 보면 확연히 대비된다.

양쪽이 모두 경제 특구로 지정되어 있다지만 단둥은 고층건물이 즐비하다.

물론 신의주는 강 건너 저 안쪽으로 한참을 들어가야 신의주 시내가 보일 것이다.

강변엔 저층의 견고한 건물 몇 채와 연탄을 입혀놓은 듯한 배 몇 척이

이마를 맞댄 채 정박해 있고 건물 옥상위로 별 그림이 선명한

인민공화국 깃발이 바람에 펄럭인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고요 속에 깊이 잠들어 있는 모습이다.


통일이 되어 압록강 철교가 새로 놓이고 많은 물자가 오고 간다면

단둥을 교두보로 심양을 거쳐 북경까지 거침없이 내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북경올림픽 응원단마저 건널 수 없다니 가슴은 답답하다.


저녁에는 조카 시아버에 의해 대형음식점으로 안내되었다.

내부 인테리어는 서울의 고급식당과는 비교대상이 되지 않지만

나름 그곳에선 최고급의 고유음식점인 것 같다.

어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식탁중앙에 화려한 꽃이 놓이고 육류보다

해물위주의 식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음식과 술, 음료 등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든 중간에 조카가 통역을 해야 하기 때문에 조금은

매끄럽지 못한 점도 있었으나 비교적 무난했다. 아쉽다면 직접

하고 싶은 말을 못하니 의미전달이 어색한 것은 표정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결혼식은 오전 11시에 시작되었다.

압록강호텔 입구에서 색종이 축포가 연달아 쏘아 올려 지며

신랑신부는 광장을 가로질러 로비로 들어선다.

우리나라 풍습을 감안 한 것은 신부가 아버지 손을 잡고 입장하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신랑이 큰절을 올리고 맞는 것은 아니고 사회자에 의해

소개되고 촛불점화와 축포점화, 장식장에 술 따르고 예물교환, 서로의 소회발표

등으로 이어져 음식을 먹는 하객들과 어울리는 것으로 끝이 난다.

물론 가족사진, 친구사진, 비디오촬영 같은 것은 비슷하다.

신부는 3벌의 드레스를 번갈아 가면서 입는 것이 특징적이다.

결혼식이 끝나면 다른 드레스로 갈아입고 인사를 하며 저녁 만찬 시에 또 바뀐다.

신랑도 멋있고 신부도 이쁘다.

통상적으로 신혼여행은 다음날 떠난다.

저녁에 같은 호텔에 가까운 친구들과 신랑신부 친구들은 다시모여

만찬을 하는 것이기에 하루 종일 결혼식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 것 같다.


피로연이 끝나고 우리 쪽 사람들만 단체로 발맛사지를 받으러 갔다.

개인당 50원(우리돈 약 8천원)하는 맛사진데 업드려 등까지 시원히 해준다.

남자는 아가씨가 하고 여자는 총각이 같은 공간에서 써비스 하는데

어찌나 정성스럽게 해주던지 효과 좋은 피로회복제가 따로 없다.


단둥에서도 부잣집이나 호텔에선 케이블을 통해

MBC나 KBS가 실시간으로 수신된다.

6월1일 TV를 켜니 촛불집회로 어수선한 뉴스가 쏟아져 나온다.

아~ 외마디 비명과 안타까움이 한숨이 되어 저절로 토해진다.

어떤 방법으로든 빨리 해결되어 국가경쟁력을 키우는데 힘을 모아야 할 텐데...

가까운 거리지만 다른 나라에서 국내의 좋지 않은 뉴스를 접하니

훨씬 더 안타깝다.


결혼식이 끝난 터라 재래시장으로 쇼핑을 가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살만한 물건은 눈에 띄지 않았는데 그래도

가장 중국적인 다기세트와 붓을 하나 샀다.

이날은 중국의 어린이 날이라 곳곳에서 폭죽이 터지고 어린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내 눈에 비친 대련과 단둥의 사회상은 마치 우리나라의 1960년대와

현재가 공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은 벤츠나 도요타 같은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낡을 대로 낡은 자전거로 인력거 노릇을 한다.

대부분이 헨드폰을 갖고 있으면서 옷 입은 모습은 남루하기 그지없다.

젊은 아가씨들은 서울 명동거리를 활보하는 한국의 직장여성과 비슷한

차림을 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아직 질서도 그렇고 거리의 이미지도 깨끗한 편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표정은 비교적 밝고 느긋하다.

또한 지금 막 깨어나는 신흥도시로 무한히 기지개를 켤 수 있는

그런 도시로 보인다. 물론, 시간이 지나 차가 막히고 공기가 나빠지며

인심이 거칠어지면 이곳 사람들도 옛날의 향수를 찾을지 모른다.


어제 저녁만찬 자리에서 몇 가지 궁금한 점을 묻는 과정에서

그들은 공자와 노자를 같은 반열에 두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노자를 훨씬 더 우위에 두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노자보다 공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크다.

그들은 아버지나 할아버지 앞에서도 전혀 거리낌 없이 담배를 피운다.

술을 마실 때도 어른 앞이라 하여 고개를 돌리고 마시는 경우는 없다.

물론 이것은 고유의 문화이기 때문에 흑백논리로 접근할 근거는 없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론 과거에 중국문물을 받아들인 우리 조상들이

그들보다 세련된 예의범절을 세우지 않았나 싶다.


저녁에는 중국음식을 더 이상 못 먹을 것 같았다.

보기만 해도 느끼한 내음이 기름범벅으로 달라붙을 것만 같았기에

압록 강변에 위치한 북한 식당으로 갔다.

어여쁜 북한 아가씨들이 손님을 맞았다.

그들은 중국어와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하루에 두 세 팀의 남한 사람이 들른단다.

노래방 시설이 되어있는데 북한 노래와 중국노래만 있지 정작

남한 노래는 없었다.

우리나라 노래방에는 ‘휘파람’같은 노래정도는 있는 것으로 안다.

써빙 하는 북한 아가씨들은 언더그라운드 가수 못지않게 뛰어난

노래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먹고 마시며 노는 장소라 많은 얘기는 못해봤지만 그들 역시

파견 나와 일하다 다시 평양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김치맛과 쏘가리 매운탕이 일품이었다.

북한 소주와 중국술을 같이 마시는데 72도나 되는 술도 한잔 꿀꺽...

크아~

오랜만에 한국음식을 먹으니 속이 편안해 지며

뱃속이 행복하게 웃는다.


2일 단둥에서 12시(중국시간)쯤 쌀국수로 점심을 대신하고

대련으로 출발했다.

승합차에 운전기사만 딸려 보냈다.

그 역시 시속 160km는 예사다. 차창 밖으로 담배꽁초는 물론이고

플라스틱 물병까지 버린다.

물론 주변에 달리는 차가 없었지만 그만큼 의식수준은 낮았다.


대련에서 중국남방항공기에 오른 시각은 대략 6시 50분.

아주 아담하리만큼 작은 항공기였다.

A열 7번 좌석.

날개도 비켜나 창문을 통해 막힘없이 밖이 보인다.

몇 번의 비행기를 타 보았지만 

이번이 제일 가깝고 실감나게 이륙하는 것을 목도할 수 있었다.

서울은 천둥 번개가 치며 세찬 비가 내렸다는데

비행기는 솟아올라 오히려 서해바다 가득 피어오른

구름 위를 거닐었다. 솜사탕을 찢어 이리저리 펴놓은 것처럼

구름은 솟구쳐 오른 것도 있고 물결모양을 이룬 것도 있다.

표현 할 수 없는 장관이다.


아름다운 구름의 여운을 안은 채 일상으로 돌아와

현실의 책상 앞에 앉아있다.


“네~ 요즘 부동산 값이 너무 올랐어요... 하지만 이물것은

아주 싸게 나왔습니다”...


 


 


 


 

압록강철교 

 

신랑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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