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생각.

고구려영토.

귀촌 2008. 6. 16. 13:10

영토나 영역 개념을 설명하는데 앞서 짚고 넘어가봐야 할 점은 근, 현대의 영토 개념이 확립되기 이전의 영토 개념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그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당시의 영토는 매우 유동성이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점과 선으로 네 땅과 내 땅을 확실하게 나눌 수 있는 현대의 영토와 달리 변경 지역 거주민들의 귀속 의식이 확실하지 않았다(쉽게 말하자면 국경의 변경이 너무나 잦았기 때문에 접경 지역 주민들은 자신이 어느 나라 사람이라는 소속감이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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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같이 강을 경계로 삼지 않는 한 

국경선을 칼로 두부 자르듯 잘라놓은 이런 식의 지도는 불가능하다-_-;  

 

 

 

 

또한 해당 국가의 성격에 따라 영토의 종류도 세분된다. 여기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고구려의 경우는 광개토대왕 이후 명확한 패권 국가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그에 맞추어서 분석해 본다면, 고구려의 영토는 크게 다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확실히 고구려 정부의 지배 아래 있는, 고구려 왕과 그 아래 제가(諸加)들의 통치 아래에 놓인 '직할령'적 지역. 건국 초기에는 압록강-두만강 유역과 남만주 일대 정도였지만 연이은 영토 확장으로 인해 한의 요동군이 존재하던 요동 지역과 옥저, 동예가 거주하던 함경도, 강원도의 해안 지역으로까지 넓혀져 갔다. 이후 5세기 초 광개토대왕은 부여 지역을 간접 통치하기 위해 '북부여수사'를  파견하였고,  그 이전부터 고구려에 대해서 약세를 보이던 부여는 제도적으로 명실상부하게 고구려 체제 하에 놓이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로 인해 부여는 494년 문자명왕 대에 이르러-물길의 침입이라고는 하지만-고구려에 항복, 고구려의 직할령은 북만주 벌판까지 뻗치게 된다. 

 


둘째, 5세기 이후 고구려 세력권 아래 들어왔음에도 그 이전에 정복되어 완전히 동화, 흡수된 옥저, 동예와 달리 동화, 흡수되지 않고 독자적인 정치 조직과 세력을 일정부분 가지고 존재한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 거란과 실위, 말갈, 신라 등이 이에 속한다. 고구려는 이들 부용 세력의 존재를 통해 자신들이 '천하의 중심'임을 명확하게 인식하고자 했고, 이들의 군대를 동원하거나 해당 국가의 군주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게 함으로써, 혹은 군대를 주둔시킴으로써 패권 국가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는 고구려의 영향력이 약해지거나 기존 체제에 변동이 가해지면 다른 패권국에 밀착하는 등의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말갈'에 대한 정리는 다른 포스트에서...

 

 

 


이러한 기본적인 분류를 바탕으로  '영토, 영역'는 첫번째 의미, '세력권'은 두번째 의미와 연결된다는 전제 아래 이 포스트에서는 요하 유역, 즉 고구려 서부 지역의 영토 및 영역을 따져보고자 한다. 

 


 서부 지역의 경우, 우선 광개토대왕의 치세를 거치면서 고구려는 이전까지 이민족 집단과의 분쟁 지역이던 요동 지방에 대한 확고한 장악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는 광개토대왕비,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거란 정벌과 숙군성 공략, 그리고 덕흥리 고분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는 요서 지역으로의 적극 진출에 힘입은 결과였다. 후연 멸망 이후 요서 지역에 들어선 북연 정권은 고구려와 중원 세력들 간의 완충 지대로서 작용하였으며, 이는 고구려에게 요동을 안정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 주었다. 

 장수왕 이래 고구려 왕은 요동군왕, 혹은 요동군개국공 등의 칭호를 북위로부터 받았는데, 이는 북위가 요동 지역에 대한 영토 야욕을 완전히 포기하였음을 뜻한다. 또한 수, 당과의 전쟁 당시에 그들 군대의 진로 결정을 어렵게 만들던 요동 지역의 촘촘한 성 네트워크가 만들어지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 이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전의 고구려는 위나라나 모용선비 등의 서쪽 이민족 집단의 침입에 너무나 쉽사리 돌파당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하 너머 요서 지역의 경우는 어떠하였을까. 요동에 비해 요서는 고구려의 성이 설치된 기록이라든가 유적, 유물 등의 발굴 성과가 매우 미비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고구려가 요서에 일절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뜻은 아니다. 고-수 전쟁 당시 수 양제는 고구려 정부가 자국민들이 요하를 넘는 것을 감시하던 '무려라'라는 성을 빼앗았다고 했는데, 이는 요서 지역에 고구려의 영향력이 전무하였던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KBS 역사스페셜 팀이 고구려 특집차 탐방한 요령성 조양 인근 지역에서는 고구려 성의 일부로 보이는 토성이나 기왓장이 확인되었다. 이외에도 '고자묘지명'에서도 고구려가 요서 지역에 마미성(磨米城)과 같은 거점을 설치하였음이 언급되고 있다.    

 

 

실제로 지금의 요령성 조양, 곧 고대의 유성, 용성, 화룡(모두 같은 지명)에는 '고려시'라고 하는 저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조양이 중원 왕조에게 있어 요서 지역의 매우 중요한 통치 거점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요서 지역에서 고구려인들이 군사 행동 뿐만 아니라 매우 활발한 경제 활동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물론 이것이 조양이 고구려 영토였다는 것은 아니다. 어디선가 그런 내용의 왜곡을 본 적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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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양이 어디냐고 물으신다면 지도에 표시된 지점이라 말하겠어요-_-;

북방 민족과 중원 민족 모두에게 있어 조양은 요서의 핵심 거점이었다.

  5세기 이후 요서로 진출한 고구려는 점차 조양 인근까지 그 세력이 미치게 된다.

 

 

 

 

5세기 이후 요서 지역의 군현들 중 핵심이라 할 만한 조양은 분명히 중원 왕조의 지배 아래 있었지만, 그 이외의 군현들은 끊임없이 줄어들었고 동시에 황폐화되었다. 이는 고구려의 요서 지방으로의 영향력 확대와 관련이 있다. <위서> '봉의전'에 보면, 고구려군과 거란족이 합동으로 북위의 동북쪽 변경을 약탈하여 북위 사신이 당시 고구려 왕이었던 문자명왕에게 약탈한 재물과 백성들을 돌려줄 것을 항의하였다고 한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광개토대왕 대 단행되었던 거란 정벌은 이민족 침략에 대한 방어적, 복수적 성격이라기 보다는 거란족을 자국 세력 아래 포섭하기 위한 전략 아래 진행된 것이었고, 그로부터 문자명왕의 통치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거란 지배가 '군사 동원이 이루어질 만큼' 매우 실제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요서 지역의 군현 수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황폐해진 것이 고구려와 거란의 합동 공격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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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서부 영역,

거란은 직할령이 아니므로 조금 옅은 색으로 구분지어서 표시했다.

 

 

 

 

결과적으로 정리해보자면 5세기 이후 고구려는 요동을 직할령, 곧 '영토'로 하여 조양 이동 지역의 요서 지역 일부와 서요하 상류 일대의 거란족 거주 지역까지를 자국 세력권 내에 두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통치는 요서 지역에 대한 지배력이 최상에 달했던 시기가 아닌, 요동 지배를 확고히 하고, 거란족을 동원한 요서 지역으로의 세력 확장이 막 시작되던 시기였다. 물론 거란족의 경우는 유연의 몰락과 그로 인한 돌궐의 동방 진출, 북제 등의 공격 및 수, 당의 중원 통일과 관련하여 그들 세력에게 복속하는 부족이 생기는 등 유동성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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