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의 커피*
이제영
입술은 한 모금 혀로 전달해 찬찬히 음미하게 한다.
코는 어느새 향기를 훔쳐 뇌에게 상납하며
딸랑딸랑 귀여움을 떤다.
오감이 살아있는 생명체의 메카니즘이
참으로 오묘하다.
토요일
장맛비 예보를 증명하듯
하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낮게 내려앉는다.
조금만 신경을 거스르면 금방이라도
한바탕 퍼부을 태세다.
사람들이 사는 것을 힘들어 할 만큼
사회는 녹녹치 않기에
삶을 즐기는 것이 목적이 될 수 는 없다지만
즐거움 없는 생활은 본능에게 저당 잡힌
가련한 삶이다.
비가 내리면
또 한 잔 의 커피가 입속을 넘보겠지.
그로인해 오감이 꿈틀대고
살아 있음을 반증하기에
산다는 것은 어쩌면,
커피 한 잔... 아니,
좋아하는 그 무엇인가를
꿀꺽~ 삼키는 것이다.
*새벽에 내리는 빗물소리*
이제영
깨진 잠은 번개마냥 사선으로 금이 간다.
그 틈새로 수많은 번민 스며든다.
새벽 네 시를 알리는 초침이 멎는다.
*지독한 열병*
이제영
엇갈린 운명 뒤에 오는 허전함
그리움이 채 잉태되기도 전
뒤엉켜 나뒹구는 현실
문신처럼 새겨진 흔적위로
장대비는 쏟아져 박힌다.
아파도 소리 내어 울 수 없는 설움
"사랑"이란 말인가...
지독한 열병을 앓고
아물지 않은 틈새로
빗물은 독약처럼 스며든다.
죽음은
최후에
스스로 선택하는 아름다운 구속
넘실대는 희열.
*초입에 선 가을*
이제영
9월 첫날 비가 내렸고
둘째 날 기온이 꺾이며 구름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가루비누로 빨래를 해 입고 나온 양
깔끔하다.
초입에 들어선 가을
앞으로도 가끔은 여름을 못 잊어 뒷걸음 칠 때도 있겠지만
어린 아이마냥
세월에 끌려 보다 깊이깊이 걸음을 떼어놓을 것이다.
하얀 한가위 달처럼
가을색은 풍성함과 퍼석함을 동시에 지니겠지.
사치스런 사유(思惟)
넉넉한 고독이 읊조리는 육자배기가락에
영혼의 현(絃)이 가늘게 떨린다.
죽음보다 깊이 잠긴다.
*서민의 일상*
이제영
늑장 부리 듯 뭉그적거리며 떠날 줄 모르는
더위
등줄기 타고 넘는 땀방울 사이로
지친 삶의 솜털 힘없이 눕는다.
가을걷이를 위해
그리움으로 맞잡은 손
채 자리도 못 잡았는데
땀으로 흥건히 고이는 푸념 섞인 슬픔.
각종 경제지표가 어지럽고
물가는 둥둥
환율과 증시는 폭 등락
세계 금융시장 불안은 끝을 모른다며
뉴스마다 지갑 털어가는 소리.
길고 질긴 늦더위쯤이야
고통이라 할 수 있겠는가
원망의 대상이야 되겠는가.
*바둑*
이제영
19X19
우주만한 바둑판이 있다 해도
이 범주 안에 있다.
집을 짓되 집이 아니고
살아있되 숨을 쉬지 않으며
죽음인들 절명하지 않는 오묘한 진리.
너무 가까이 있어도 보이지 않고
너무 멀어도 알 수 없는
상대와의 수담
절제된 호흡너머 유영하는 영혼
긴장과 환희가 교차되는
살벌 짭쪼름한 돌 놓이는 소리
19로 미로 쉼 없이 넘나드는 긴
호흡
네가 있어 내가 존재하는
반상의 희열.
*기와*
이제영
무한한 공간
죽어 천년을 견디는 침묵
살아 백년도 못가는 허영
뉘 공들인 손길
이글대던 불길
쌓이고 쌓인 한(恨 ) 이런가
습격해 오는 찬 서릿발 위로
시간의 성에 이끼 되어 덧칠되고
그리움은,
높아진 하늘에 내걸려 애잔히 펄럭인다.
*까치둥지*
이제영
얼기설기 덧대 빚은 최고 걸작
지붕 없고 바람 숭숭
은은 솔 향
달콤 꽃 향
냉랭 설 향(雪香)
여름가고 가을 올 때
스리 살짝 나뭇가지 주워오면
집단장이 따로 없네.
자연산 원재료에 강물 뵈는 호화별장
소슬바람 자연미에 부러움이 한 광주리
*음악 감상*
이제영
눈을 감고
흐르는 선율위에 마음을 놓으며
영혼까지 내맡긴다
못 다한 말들이 떠돌아다닌다
해맑게 웃고 있는 말
슬픔에 잠긴 말
숱한 언어가 춤을 춘다
그리움 속으로 잠겨든다.
*아침 바람*
이제영
아침에 일어서는 바람은
깍두기 모양으로 정갈하다
투명해서 사뭇 시리고
쨍그랑한 감(感)이 좋아
머릿속도 맑아진다
맑은 영혼이다.
*가을날의 사랑*
이제영
노란 은행잎 수직으로 하강하는 고요한 아침
스르륵~ 바스락~~
떨어진 잎이 미동도 없는데
얼른 주워든다.
부채 모양이라 손잡이를 잡고 빙빙 돌려본다
샛노란 물방울이 머리위로 후두둑 떨어지고
온몸이 노랗게 물드는 환타지 같은 상상
늦가을은 그렇게 눈에서 자꾸만 멀어져 간다.
일상은 모든 것이 추억으로 바뀌고
떨어지는 낙엽이 되고
자꾸만 멀어지는 회상속의 환상이 된다
'사랑'이란 것도
애틋함이 엷어지면 과거 속 환상이다
애타게 그리워하고
만나면 쿵쾅거리는 설레임 주체하지 못해
맞잡은 손 끝끝내 놓고 싶지 않던
회한속의 사랑
기억 속에 늘 실존하는 현실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
항상 신선한 공기처럼 설레임이 꿈틀대는
그리운 사람
봄부터 가을까지 천천히 물든 은행잎처럼
아름다운 사랑은 시나브로 물든다.
*삭풍이 점령한 아침*
이제영
사람들은 도시를 만들고
도시는 그들을 불러들여
내가 갇히며 너를 잡아 맨
거대한 섬이다.
하룻밤 새 세상은 온통 날카로운 삭풍이 점령하여
은행나무 화려한 옷을 몽땅 벗겨버렸다
살기 위해 벗어던진 진노랑 물결위로
도심의 자동차는 질주본능을 멈추지 않는다.
간밤의 쿠데타를 아는지 모르는지
비둘기 떼는 이리저리 배회하고
술 취한 사람들은 주섬주섬 옷깃을 여민다
세상은 그렇게 취해서 도는 양
틈바구니마다 잇속을 챙기는 전쟁이 한창이다.
*12월의 창*
이제영
달력을 떼어내니 문이 열리기만 기다렸다는 듯
12월의 숫자가 우르르 솟아오른다
스물 한개는 검은 정장 차림
다섯은 붉은 야회복 넷은 파란목도리를 두르고 있다.
겨울의 본모습을 보이는 12월의 표정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준엄한 카리스마가 있으며
마음을 설레게 하는 크리스마스가 있어
야누스(Janus)를 닮아있다
12월은 징검다리다
올해의 끝자락과 내년의 첫 문을 연결하는
지고지순(至高至順)한 운명의 달이다
가뭇가뭇 잊혀지는 것 들을
한 번 쯤 뒤돌아보게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깍지낀 손으로 서로를 확인한다
하나 둘 술 권하는 숫자에 동그란 울타리가 생긴다
어떤 것은 중요표시까지 훈장을 매달아 무거워지고
메모까지 문신처럼 새겨지면 주머니는 휑한 바람이 찬다
12월은 동지 팥죽으로 따스한 정(情)을 나누고
사악한 액(厄)을 막는다
내 창(窓)으로 들어온 12월은
늘 목젖 언저리를 맴도는 한마디
하트모양의 그 한마디를
올해도 자맥질만 하다가 가라앉을 것 같다.
*차향(茶香)*
이제영
뚜껑을 열자 실연기로 다가오는 향
먼 산골바람과 햇빛 머금은 청량한 기운
은색 종소리로 풀어 놓는 찻잎
거름망 들어 올려 멱 감은 알몸을 본다
누군가의 손길 닿은 섬세한 지문(指紋) 하나
시간을 먹고 세월을 건너 나에게로 온
그 사람의 마음 한 칸
입 안 가득 차밭의 일손이 향기로 고인다.
*아버지와의 통화*
이제영
전화가 연결되면
그리움은 한 달음에 달려와
고막을 통해 심장에 박힙니다
목소리의 음색에 건강도 묻어나고
기쁨이나 고민도 전류처럼 흘러옵니다
혹여 슬픔을 걸러낸다 할지라도
내 심장의 자동 감지기는 당신의 속내를 모두 읽어냅니다
'눈이 겁나게 쌓여 차도 안댕긴다'
사방 흰 눈에 갇힌 고립무원
그 고독의 정점
폭설을 통해 내 가슴에 와 닿습니다.
*눈 내리는 날*
이제영
눈 내리는 광경에
가슴속 설렘 버튼 빨간불이 깜빡인다
지천명 가까이 보아온 모습
그냥 지나칠 만도 하련만
기어이 눈발 맞으며 공원에 나선다
희뿜한 눈빛
끝없이 이어지는 여리 여릿한 군무(群舞)
바람결 따라 학춤이 되고
신들린 듯한 로큰롤이 된다
무언의 아우성
흔들림 끝나면 이내 고요 속으로 잠겨드는
겨울 진객(珍客)
진종일 가슴 한쪽이 붉게 깜빡인다.
*기다림*
이제영
잔잔한 울림
간질거리는 마음 다독이며
소쇄(瀟灑)한 눈망울로 깊은 하늘
건저 올리는 것
세월의 얼개가 낳은 그리움의 어머니.
* 봄볕 좋은 오후 *
이제영
파랗게 쑥 잎 불러오는 볕만 있어도
봄은 화사한 옥색 치마
핸드폰 문자로 띵동 보내는 메시지에
파스텔톤 장신구가 빛난다.
유리문 안 텅 빈 공간
봄볕은 조용한 허탈감
댕강 잘려진 현기증에
봄 멀미는 휘청거린다.
겨우내 부식된 실내공기
연한 바람으로 씻어내고
어깨위에 걸터앉은 삶의 무게
풍금소리 같은 봄볕에
잠시 일광욕을 한다.
*가로수 가지치기*
이제영
도심에 시립한 커다란 가로수
매년 이른 봄이면 이발을 한다.
모진 비바람
강한 햇빛과 컬컬한 매연 마셔가며
애써 키워온 꿈
번득이며 달려드는 낫과 왱왱거리며 파고드는 톱날에
연중행사처럼 뚝뚝 꺾인다
사람들에 의해 양육되어지는 관상수 노릇
그가 자처한 것은 아니건만
도망갈 생각도 못하며 베이고 잘리면서
어찌 원망이야 없겠냐만
또다시 부지런히 잎을 피워 올린다
일상의 모든 것을
흙속에 파묻고 단단히 선 발 끝에
일기처럼 기록하고 정교하게 설계 한다
이른 봄이면 또 잘려나갈
새순을 끊임없이 만들기 위해.
*튀밥*
이제영
어린 시절 장(場)날 할머니는
튀밥을 사왔다
한 움큼씩 입에 넣으면 와삭와삭
고소한 소리가 났다
명절이면 한과에 튀밥 옷을 입혔다
대바구니 위로 한지가 덮히고 뚜껑으로 막음 하면
아름다운 맛도 함께 갇혔다
환한 봄볕아래 벚나무는
여린 튀밥 옷을 입고 있다
보이지 않는 할머니의 한과 맛에 침이 고인다
아랑아랑 향기 묻은 그리움 일렁인다.
*잔인한 4월*
이제영
봄은 채 익지 않았는데
기온은 초여름의 정수리에 올라섰다
계절이 뒤바뀐 옷을 입고 깔깔대며 지나가는
오후
뉴스는 귀를 의심케 하는 것들
끈덕지게 달라붙는 오물
절벽을 느끼는 사람들은 늘 배가 고프다
본능만으로 살아내는 사람들
양파 사라고 외치는 트럭 뒤로
연이어 갈치를 외치며 지나는 트럭
봄볕을 찢어발기며 다가서는 실업의 공포
순간순간 쓰러져 가는 표적 같은 삶
텅 빈 가슴속에
미소 한 묶음
희망 동동 띄운
막걸리 한 사발 부어본다
취기라도 올라야 집으로 들어갈 것 같은
잔인한 4월.
*봄비*
이제영
빗물은 낮은 포복(匍匐)으로
땅 기운에 몸을 섞는다
생명을 불어넣는 무한 에네르기
꿈틀꿈틀 싹을 틔우고
나목의 여린 잎사귀를 밀어 올린다
도심의 길 위와 건물 유리벽에
사선으로 헤프게 내려앉는
너는
낡은 기억의 끄트머리 끌고 와
그리움 한 소절
홀로 감당하게 만들지.
*횡단보도*
이제영
운전 하다 횡단보도 앞에 멈춰서면
유리창 너머로
수많은 사람들의 엇갈린 표정이 횡으로 엮인다
각양각색의 의상이 햐얀 건반위로 넘실댄다
파란 신호등에 밀려
바쁜 삶이 총총히 사라진다